Journal of Korea TAPPI. 30 August 2015. 168-176
https://doi.org/10.7584/ktappi.2015.47.4.168

ABSTRACT


MAIN

1. 서 론

종이접기는 단어 자체에서 알 수 있듯이 종이를 접는 행위를 의미한다. 종이를 접어 만든 결과물까지를 포괄하는 용어가 종이접기공예이다. 접지(摺紙)공예와 절지(折紙)공예라는 용어도 있으나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 고문헌에는‘공예(工藝)’라는 용어는 나타나지 않고,‘접지(摺紙)’라는 용어는 지갑(紙甲)을 만들 때 지갑의 표면에 부착하는 미늘(札)을 만드는 방법1)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에는 미술과 공예가 용어적으로 분리되기 전이기 때문에 포괄적으로 해석해 접지공예로 의미를 부여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으로 사료된다. 우리나라에서‘공예’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사용된 때는 1881년으로 개화시기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한 조선 정부의 빈번한 대외활동과 맞물려 주로 외교문서에서 그 용례를 찾을 수 있다.2)

우리의 고문헌에는 접어서 만든 공예품도‘첩(疊)’3)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했고, 동시에 구조적으로 완성된 단계(병풍, 빗접)에서 접는다는 의미로도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첩(疊, たたみ)은 접는다는 의미와 함께 방에 까는 돗자리를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종이접기를 뜻하는 절지(折紙)4)라는 용어가 있긴 있으나 종이접기 공예와는 관계가 없는, 관련자 외에는 보지 못하게끔 접어 봉하는 공문서를 뜻하고 있다.

종이접기공예품이란 종이를 반복적으로 접어 동·식물이나 생활용품을 만들거나 전통놀이에 필요한 도구를 만든 것을 의미한다. 그 자체를 펼치면 입체적인 형태를 갖는 것이 특징이다. 오늘날은 다양한 기법으로 여러 형태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규격에 제한을 받지 않고 필요에 따라 정(직)사각형, 정삼각형, 원형 등의 종이를 사용하기도 하고, 가위질을 하거나 풀칠을 하여 여러 장으로 작품을 만드는 것 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과거의 종이접기는 놀이용이나 의례용, 민예품을 만드는 방법으로 이용되었으나, 오늘날은 종이접기 공예품에 대한 예술적 가치가 재평가되어지고, 교육적 효과가 증명되면서 어린이뿐만 아니라 성인에 이르기 까지 애호가들이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애호가 들은 도저히 종이로서는 표현해 낼 수 없을 정도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작품들을 만들어 예술과 과학으로 승화시켜나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학자들은 기하학과 분자모형 활용에서부터 우주정거장 설계에까지 활용하고 있어 종이접기를 우주과학의 영역으로까지 발전시켜 놓고 있다. 따라서 종이접기는 단순한 놀이가 아닌, 교육과 예술, 과학으로 발전해 가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다양한 색상과 디자인된 종이를 사용해 전통공예품과 창작품 위주로 상업화되어 가고 있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발전을 거듭할 수 있게 끔 한 가장 큰 원동력은 종이가 갖고 있는 강도적 특성 때문이다. 즉 유연도(柔軟度, stiffness强度)가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초의 접는 행위(접기)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종이가 아니고 직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직물은 유연성이 있어 입체적으로 접어 형태를 만들어 내는 데는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하지만 면적과 부피를 줄이기 위한 접는 행위의 대상으로서는 유연성이 있어야 적합했다. 이처럼 접기는 생활 속에서 직물을 통해 반복적으로 수행되어온 행동 양식인 것이다. 그 후 본격적으로 창의성있는 사물을 접어 입체적인 모형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시기는 강도적 성질을 부여할 수 있는 재료의 탄생 이후 이었을 것이다. 그 재료가 바로 종이인 것이다. 따라서 직물에 적용되었던 접기 기법이 강도를 유지할 수 있는 종이에 적용되면서 자연스럽게 창의성 있는 입체 형태를 접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종이의 강도적 성질이 인간의 무한한 창의성을 구체화 시켜주는 매체로서의 역할을 한 것이다. 이처럼 종이는 서사재료로서 문명의 이기(利器)였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무한한 창의성을 구체화 시켜주는 창조문화의 소재인 것이다.

우리민족의 종이접기 역사는 일본보다 앞서있고, 그들보다 탁월한 손재주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이접기에 대한 관심의 소홀로 국제공용어가 일본어인 오리가미(Origami)로 통용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우리의 선조들이 창의성을 발휘해 만든 종이접기공예품을 중심으로 그 원류와 함께 역사성을 찾아 종이접기공예의 역사적 기반을 정립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2. 본 론

2.1 고깔의 원류와 역사

BC 4000년경부터 대마를 재배했다는 기록5)으로 미루어 보면 이후에 제직(製織)기술이 고안되어 이용되었을 것이고, 이 직물을 가공하거나 보관하기 위하여 자르고 접는 행위가 이루어 졌을 것이다. 따라서 세계적으로 직물을 접었던 행위가 접기 공예의 원류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직물을 접어 이용한 결과물로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은 풍속으로 이어져 내려 온 고깔쓰기이다. 고깔은 중국 주나라 때의 관(冠)인 변(弁)에서 시작 되었다고 하나,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 고유의 풍속으로 고깔(弁)을 썼다고 하는 것을 중국의 사서인 북사(北史)와 신당서(新唐書), 책부원구(冊府元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재인용하여 기록하고 있다.6) 또한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의 신라전에도 “신라국은 본래 변한의 후예이다(新羅國, 本弁韓之苗裔也)”라는 기록이 있다.7) 이 변한(弁韓)이라는 말은 고깔모자(皮弁)를 쓰는 한인(韓人)이라는 뜻이다. 즉 부족국가 시대부터 고깔을 쓰는 풍속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고깔을 쓰는 민족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고깔문화를 갖고 있던 중앙아시아와 지나국의 경계선상에 있는 천산(天山)의 동서지역에 살고 있던 사카족이었다. 페르시아 고분에는 다리우스(기원전 521~486)왕에게 잡혀 온 주변 지역의 수령들이 그려져 있는데, 그림 맨 오른쪽 인물이 사카족의 수령인데 그 만이 고깔모자를 쓰고 있다.8) 사카족이 신라의 김씨 왕조와 관련이 있다는 경북방송의 보도9)에서도 알 수 있듯 한반도에는 고구려를 비롯해 신라에서도 고깔을 쓰는 풍속이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깔을 접어 만드는 기법에서 접기 형태의 원류를 찾아 볼 수 있다. 당시의 고깔은 주로 저마포(苧麻布)로 만들었으며, 만드는 방법은 이등변삼각형으로 배접한 베 조각을 둘로 꺾어 접어 다시 이등변삼각형이 되게 하고, 터진 두 변에서 밑변만 남기고 다른 변은 붙게 하여 만들었다.10) 당시의 고깔은 종이를 이용해 접은 것은 아니었다. 삼국시대는 우리나라에 제지기술이 전래된 초기로서 종이의 주 용도가 서사용이었기 때문에 생활용품이나 공예에 이용하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삼국시대에는 제정일치의 시대이었기 때문에 주술(呪術)과 의례(儀禮)용으로 종이 사용이 가능했던 것이다.11) 당시 삼국시대의 고깔은‘곳갈’이라고 표기했는데,‘곳’은 첨각(尖角)을,‘갈’은 관모(冠帽)를 의미하는 것으로 변(弁)의 형상과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고깔을 쓰는 풍속은 삼국시대 이래 우리나라 관모의 고유한 형태인 변형(弁形) 관모[折風]로 이어져 왔으며, 이것이 통일 신라·고려·조선으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재질과 함께 모양이 다양하게 발전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처럼 접는 행위가 이어져 내려 온 것은 생활 속에 필요로 하는 직물이 있었기 때문이고, 이 직물을 보관하거나 자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접는 행위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직물 접기가 직물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는 종이에 적용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최초로 종이를 접었던 시기는 종이 유물로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방마탄지(BC 179~141)12)가 제조된 이후였음은 틀림이 없다. 그 후에 이 종이를 접어 공예품을 만들거나 생활용으로 이용한 시기는 종이 사용이 보편화 된 이후 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종이를 생활에 이용하기 위해서는 사용에 불편함이 없도록 하는 가공기술이 발달한 이 후이었을 것이다.

종이를 생활에 이용한 대표적인 예가 고깔이다. 이 고깔은 1605년(선조 38년) 작가 미상의 선묘조제재경수연도(宣廟朝諸宰慶壽宴圖)13)라는 그림에서 고깔의 소재가 종이임을 알 수 있는데, 이 고깔의 모양은 유연강도가 유지되는 종이가 아니고서는 형태가 유지 될 수 없는 끝이 뾰쪽한 모양이다. 이를 입증할 수 있는 기록은 이보다 빠른 1415년(태종 15년)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의하면 향리의 입제(笠制)를 상정하면서 유지모(油紙帽)를 비나 눈이 오는 날에는 함께 사용하도록 하는 기록14)이 있어 고깔을 쓰는 일이 보편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비가 오는 날에도 사용할 수 있도록 기름칠을 한 유지(油紙)를 접어 만든 고깔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를 소재적인 측면에서 뒷받침해 주는 자료가 일차적으로 두껍고 질긴 종이를 만드는 방법인 도침(搗砧)에 대한 기록이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기록15)되어 있고 후가공(後加工) 방법으로 피마자유를 사용했다는 기록은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16)에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인 1308년(충열왕 34년)에 이미 장흥고(長興庫)라는 관아가 있어 돗자리·유둔(油芚)따위의 관리를 맡았다는 기록17)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지를 이용한 고깔 제작은 이 무렵 이전으로 소급할 수도 있으나 증빙이 될 만한 자료나 그림이 없어 유감일 따름이다.

유지 제조는 당대(唐代)에 이미 창호지에 빙유(氷油)를 발라 따뜻하게 했다고 하는 기록18)도 있어 보편화되었던 종이 후가공 기술이었다. 당시의 가공법이 8세기 중엽 통일신라시대에 전래되어 유지를 제조했을 것으로 사료되고는 있으나 두꺼운 종이에 빙유를 이용했다는 기록은 우리의 고문헌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 방법은 주로 북향의 창호에 적용하는 방법으로서 두꺼운 종이에 찬 얼음으로 기름성분의 용해도를 조절해 침투 정도를 조절하는 방법으로서 밝음과 따뜻함을 동시에 취하고자하는 과학적인 후가공법이다. 그 후 조선시대 초기부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일성록(日省錄)·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유둔(油芚)이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 종이가 용도 개선을 위해 기름을 칠한 유지(油紙)인 것이다. 따라서 1415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유지모(油紙帽)는 고깔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유지를 접어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고깔은 관모(官帽)의 일종으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갓에도 이용되었는데 유지로 만든 특성 때문에 비가오거나 날씨가 좋지 않을 때 갓을 덮는 갈모로도 이용되었다. 이처럼 고려시대부터 종이가 각 생활분야에 이용될 수 있었던 것은 장흥고(長興庫)라는 국가기관이 있었기 때문이고, 종이의 특성을 잘 알고 용도에 맞게 가공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고깔은 1415년(태종 15년)경부터 보편화되기 시작하여 1605년(선조 38년) 무렵에는 아주 대중화된 풍속으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2.2 위목(位目)의 원류와 역사

종이공예품이나 종이를 이용한 생활 용품은 직물에서 유래된 것이 대부분이나 예외적으로 위목(位目)만은 신(神)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직물을 거치지 않고 곧 바로 종이의 특성인 유연도를 이용해 접어 세워 만들어 이용한 것이 특징이다. 고대 국가는 제정일치(祭政一致)시대이었기 때문에 주술(呪術)용이나 의례(儀禮)용으로 하얀 종이를 사용할 특권을 갖고 있었다. 하얀 종이는 순수하기 때문에 신을 모시는 무구(巫具)로서 적합한 재료로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날도 전해져 내려오는 위목(位目)접기와 설위설경(設位說經)이 대표적인 예가 되고 있다. 충남 서북부 지역인 서산, 태안, 홍성, 보령 등에서 행해지고 있는 앉은굿을 할 때 종이무구를 만드는데 이 종이무구를 설위(設位), 설경(設經), 설위설경으로 부르고 있다. 이처럼 하얀 종이가 설위설경(說位說經)으로서 민속 신앙의 굿당을 꾸미는 무구로 이용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상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부족국가 시대에 주술(呪術)이나 의례(儀禮)제도가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종이와 함께 전래되면서 일본에서는 종이자체를 신성시하는 의미에서 종이를 신(神)과 같은 의미로‘카미(かみ)’라는 명칭을 붙이지 않았나 하고 추론해 볼 수 있다. 신을 모실 때 이용되는 종이무구들은 대칭 형상이 주를 이루는데, 이 형상들을 반복시켜 길이를 길게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형상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종이를 반드시 접어야하고 이를 잘라야한다. 그리고 이를 반복적으로 수행해야 무구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가 된다. 따라서 종이를 접는다는 의미에서의 원류를 찾는다면 설위설경이 최초가 될 수 있으나 그 결과물이 접은 상태로 유지되면서 형상이 입체형으로 만들어져야 종이접기 공예품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접어 잘라 만든 문양은 종이접기 공예품으로 분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신령의 이름을 적는 위목(位目)만은 종이를 접어 만들었고 그 형태가 입체형을 이루고 있어 종이접기 공예품이라고 볼 수 있다. 토속신앙 위주로 위목 접기 형태가 전해져 내려오다가 본격적으로 조선시대에 들어와 유교 문화인 제사가 널리 보급되면서 지방(紙榜)이라는 명칭으로 풍속으로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제사의례를 사회적 관습으로 인정해 정책화를 주도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라는 예법서가 발간된 조선 초기(1474)무렵부터 풍속으로 토착화 되었다.

2.3 접선(摺扇)의 원류와 역사

접선(摺扇)은 부채의 일종으로서 종이를 접어 만든 부채의 일종이다. 접선은 우리가 만든 순수한 접는 부채의 명칭이며, 오늘날의 접는 부채의 대명사인 합죽선(合竹扇)은 접선의 한 종류이고 제조방법만이 다른 부채의 종류이다.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부채’라는 용어의 원류는 송대(宋代)의 계림유사(鷄林類事)에 수록된 고려어 어휘‘패채(孛采)’라고 하는 용어에서 유래되었다.19) 당시 고려의 부채 종류는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의하면 반리선(盤螭扇), 쌍리선(雙螭扇), 수화선(繡花扇), 우선(羽扇), 곡개(曲蓋), 청개(靑蓋), 화탑선(畵搨扇), 삼선(杉扇), 백섭선(白摺扇), 송선(松扇) 다양했는데,20)이 중 백섭선을 발전시킨 부채가 접선인 것이다. 접선은 부채 살을 이용하여 종이를 접었다가 펼칠 수 있고 다시 접어 부피를 줄일 수 있는 종이 접기의 기법이 응용된 공예품이다. 접는다는 의미에 부채라는 의미의‘선(扇)’자가 붙으면서 우리만의 독특한 형태의 접는 부채인‘접선(摺扇)’이 탄생된 것이다. 부채는 종이를 이용해 만들기 전에는 깁(비단)을 이용해 만들었다. 그러나 접선만은 깁을 이용해 제작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깁은 강도적 성질이 없어 일정한 형태로 접혀지지 않고 부피가 크기 때문에 접선용으로는 부적합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 민족의 창의성이 발휘되어 당시 종이만이 가질 수 있는 특성인 유연도를 이용하고자하는 획기적인 발상으로 접선을 고안해 낸 것이다. 이 접선의 인기는 1123년에 기행문 형태로 쓴 선화봉사 고려도경의 기록에도 남아 있다. 즉 "고려인들은 한겨울에도 부채를 들고 다니는데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신기한 것이다”21)라고 하는 내용과 접을 수 있는 부채를 ‘고려선(高麗煽)’22)이라고 한 것 등이다. 북송의 곽약허(郭若虛)가 1074년까지 활약했던 화가들에 대해적은 글인 도화견문지(圖畵見聞誌)23)에도 "고려에서 중국에 오는 사신들은 접첩선(摺疊扇)을 사용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중국에는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초까지는 아직 접는 부채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중국에는 접는 부채가 없다가 비로소 북송 때 고려에서 접선이 전래 되어 이것을 모방하여 만들면서부터 접선이 일반화되었기 때문에 부러워 할만 했을 것이다. 이 외에도 중국의 사신들은 고려에 와서 접선에 그림이나 글씨를 넣은 고려서화선(高麗書畵扇)을 갖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이렇게 되자 조선 정조 때에는 접선에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궁중화원(宮中花園)24)을 두었는데 주로 산수화나 초충도, 화조도, 나비, 태극 등을 그렸으며‘서화선(書畵扇)’이라는 별도의 명칭이 생길정도로 접선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유행했던 시기도 있었다.

오늘날의 합죽선(合竹扇)은 접는 부채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져 있고, 또한 널리 이용하기 때문에 접선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다. 그 정확한 뜻은 질 좋은 대나무의 겉대를 얇게 깎아 양면을 서로 접합하여 붙인 살에 닥종이를 양면에 붙여 만들었다고 하여 합죽선이라고 한다. 합죽선은 부채 본연의 기능 외에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려넣어 미술적 가치가 높은 고급 부채이며, 손잡이 부분이 손바닥의 지압점을 누르도록 정교하게 만들어져 건강에도 이롭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여인들이 노리개나 은장도를 소지하듯 합죽선을 사철 소지하여 길을 가다가 불량배나 강도를 만나게 되면 호신용 도구로도 사용하였고, 내외(內外)를 하거나 예의를 지켜야 할 곳에서는 얼굴을 가리는 역할을 하는 필수 신변품이기도 했다.25) 기본구조는 크게 변대, 목살, 속살, 부채얼굴로 구분되며 목살에는 인두를 이용해 박쥐그림을 각각의 목살에 그려 넣었다. 부채의 양쪽 가장자리의 변대는 대나무 뿌리의 작은마디를 붙여 만들었으며 마디마다 문양을 넣었다. 부채 얼굴인 닥종이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오른쪽에는 글귀와 낙관이 찍혀 있다. 목살을 고정시키는 못인 사복(砂卜)은 백동으로 장식되어 있고 부채 손잡이에 있는 고리에는 노리개의 매듭이 달려 있다.

이러한 기록에 근거하여 우리나라에서 종이접기 공예가 접선에 응용된 시기는 1074년 무렵임을 알 수 있으며, 적어도 고려 중기에는 종이접기공예가 활성화되어 있었음을 고려서화선(高麗書畵扇)을 통해 알 수 있다.

2.4 지화(紙花)의 원류와 역사

오늘날도 합성소재를 이용해 꽃을 만드는 것이 보편화 되어 있듯, 조선시대에도 세저포(細苧布)와 같은 베를 이용해 만들고 있어, 일회용 치고는 값이 비싸 지금부터는 진상(進上)이나 사신(使臣)을 연향(宴享)하는 외에는 제철에 피는 꽃을 이용하거나, 물들인 종이로 꽃을 만들어 사용하자26)는 취지에서 지화공예가 발달하게 되었다. 즉 당시의 조화는 값이 비싼 소재를 가지고 만들었기 때문에 이를 자제하자는 것이었다. 이 시기가 태조7년(1398)이므로 조선시대 이전부터 조화를 만들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시기는 우리의 종이를 다양하게 지공예에 응용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종이접기 기법을 응용해 지화를 만든 시기는 기록상으로 1398년이 최초인 것이다. 값비싼 소재 사용에 대한 절제를 요구했으나 이행이 되지 않자 궁내(宮內)에서 연회(宴會)하는 과상(果床)에는 지화(紙花)를 사용하고 어람홀기(御覽笏記)에는 홍릉의(紅綾衣)를 없애고 능화지(綾花紙)로서 대신할 것을 명하고, 임금도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 종이로 만든 어사화를 하사하였다.27) 세종 때에는 공사간의 불교행사에도 지화를 사용28)하도록 하였고, 영조 때(1746년)에도 구체적으로 대소 연례(宴禮)에“지화만 사용하고 납화(蠟花)를 쓰지 말라”하였다.29) 이러한 조치는 대대로 이어져 세조·인조·광해·선조·영조·정조 등 여러 대에 걸쳐 지화 사용을 권장하였다. 그 결과로 지화는 견화(絹花), 금화(金花), 은화(銀花)와 같은 조화에 비해 사용빈도가 높아졌다.30) 이러한 조치 덕분으로 지화공예는 안정적으로 발전을 거듭해 올 수 있었으며 다양한 종이접기 기법을 창출해 내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불교와 도교, 무속에서도 의례용으로 지화를 이용했으며, 여염집에서는 혼례상이나 잔칫상을 치장하는데 이용했고, 상여를 지화로 치장하는 등, 우리 민족에게는 단순한 지화가 아니라 관혼상제와 같은 의례나 삶 속에서 항상 함께했던 꽃 공예로 발전하게 되었다. 지화가 상화(床花)로 사용된 이유는 다른 재료로 만드는 조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용이 저렴하였기 때문이다.31) 그러나 일회성으로 끝나는 행사에 대체할 수 있는 대용품으로 만들어 졌기 때문에 전해 오는 유물이 있을 수 없다. 더욱이 행사가 끝나면 바로 불에 태우거나 버리는 관행과 일부 종교나 무속신앙에서만 사용하는 꽃으로 잘못 알려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점점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는 실정이다. 지화도 기타의 재료를 이용하는 조화(造花)와 함께 이미 고려시대에 왕실의 연회에 사용되었고32)조선시대에도 그 전통이 이어져 내려 온 우리의 전통한지공예 중의 하나인 것이다.

2.5 첩(疊)의 원류와 역사

첩은 접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으면서, 공예품으로는 종이를 두껍게 배접해 골격을 만든 후 접어 만든 공예품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겉보기는 보통의 책과 같으나 펼치면 겹겹으로 펼쳐지게 만든 종이공예품을 의미하고 있다. 표지는 속지보다 더욱 두껍게 배접한 후 의미 있는 문양을 오려 붙이거나 색지로 장식하거나 직접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내구성을 위해 도침된 종이나 유지를 사용하기도 한다. 더욱 사치스러운 것은 비단으로 수(繡)를 놓거나 무명천으로 장식하기도 한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첩 공예품으로서는 종이 빗접고비(皐比)가 있는데, 이것은 남녀가 1년간 빗질할 때 빠진 머리카락을 유지(油紙)로 만든 퇴발낭(退髮囊)에 모아 보관하는 용도로 이용되었다. 설날 황혼에 문밖에서 태우면 나쁜 병을 물리친다고 하는 풍습28)이 있어 많이 애용되었던 첩 공예품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첩 공예품으로서는 색실첩과 담배쌈지가 있다. 조선시대 중엽에 수입된 담배는 1800년대에 이르러 전 국민에게 확산, 소비되었는데 엽초를 휴대하기 위해 간편한 종이 담배쌈지가 널리 사용되었다. 이외에도 미세한 가루나 약제를 넣어 두었던 종이로 만든 지낭(紙囊)이 있었고, 종이는 아니나 첩이라는 명칭을 가졌던 또 다른 공예품으로는 살가림[乏]33)이 있었다. 이 공예품은 군사용으로 이용되었는데 후(候)의 옆에서 화살을 피하는 물건이었기 때문에 부드러운 가죽[韋]으로 만들었다. 높이와 폭이 각각 7척(尺)이고, 형상은 병풍과 같고, 3첩(疊)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첩(疊)’이라는 용어는 두께가 있는 완성품을 접는다는 의미와 함께 공예품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2.6 봉투(封套)의 원류와 역사

오늘날 봉투는 제작되어 문구점에서 판매를 하고 있으나 옛날에는 돌잔치나 세배 돈을 넣는 돈 봉투를 직접 정성을 들여 접어 만든 종이접기 공예품이다. 이러한 봉투의 시원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진흙봉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왕이나 권력자만이 보아야 하는 비밀문서는 다른 사람이 볼 수 없게 끔 해야 했다. 그 당시에는 점토판에 글을 새기고, 다른 점토판을 포개어 양끝을 이겨서 봉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낙랑시대 유물에서 진흙봉투가 출토된 바가 있다.34) 이를 봉니(封泥)라고 부른다. 봉투라는 단어는‘구부려 덮어 봉한다’는 의미에서 유래된 것이다. 봉니를 니봉(泥封)이라고도 했는데, 옛날 중국에서 문서를 노끈으로 묶어 봉할 때 사용하던 아교질(阿膠質)의 진흙 덩어리이다. 봉니 위에는 고대인들이 사용한 인장(印章)의 유물이 있어 당시의 관제(官制)와 행정부서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따라서 후세에 고대의 문자나 관작(官爵) 및 지명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사료로 이용되기도 한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 고대인들은 대나무나 나무판 또는 비단(緋緞)에 글을 썼다. 이러한 이유에서 서신을 죽간(竹簡)이나 척독(尺牘, 1척 길이의 목판), 척소(尺素, 1척 길이의 비단) 등으로 불렀다. 여기서 소(素)란 비단을 의미한다. 이 후 종이가 봉투에 이용되면서 문헌 기록과 고고학 자료에 따르면 전국(戰國)시대부터 중국인들은 간독(簡牘)에 글을 써왔다. 한(漢)나라 때 살청(殺靑)이란 대나무로 간서(簡書)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막 자른 대나무에는 진이 있기 때문에 이 진을 빼주어야 한다. 이 진이 남아 있으면 부후하기 쉽기 때문에 간(簡)을 만들 때는 불에 구워 건조시켜야 한다. 진(陳)·초(楚)에서는 이것을 한(汗)이라고 하는데 액체를 제거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후대에는 어떤 서적을 탈고(脫稿)하거나 저작을 완성하는 것을 살청(殺靑)이라고 했고 한청(汗靑)은 역사책을 지칭하기도 했다. 한편 독(牘)은 목간(木簡)을 가리키는데 사적인 편지, 계약 내용이나 장부 등을 기록할 때 사용했다. 편지를 다 쓴 후에는 비슷한 크기의 목판을 이용해 독(牘) 위에 글자를 새긴 표지를 했다. 이 목판을 가리켜 검(檢)이라 했다. 검은 지금의 편지봉투와 유사한 것으로 그 위에는 받는 사람의 성명, 주소가 있었는데 이를 서(署)라고 했다. 또 독과 검을 노끈으로 한데 묶은 것을 함(緘)이라 했다. 비밀을 유지하고 전달자가 몰래 편지를 뜯어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검(檢) 위에 깊은 고랑을 새긴 뒤 구멍을 뚫어 끈으로 묶고 그 위에 진흙을 단단히 덮었다. 진흙 위에 인장(印章)을 찍어 증거로 삼았는데 이것이 바로 봉니(封泥), 즉 봉투이다. 한(漢)나라 때 황제는 자색(紫色)인장이 새겨진 서신(書信)을 이용했기 때문에 자니(紫泥)와 자니봉(紫泥封)은 황제의 조서(詔書)를 대신하는 단어로도 사용되었다. 봉니(封泥)는 전국(戰國)시대부터 한나라를 거쳐 위·진(魏·晉)시대까지 널리 사용되었지만, 진(晉)나라 이후 종이가 널리 보급되면서 점차 간독(簡牘)을 대신했고 봉니(封泥) 역시 역사에서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봉투의 역할이 문서를 보관하는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문서에 비해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될 수는 없어 우리의 고문헌에서도 영조 대에 봉투(封套)라는 용어35)가 처음 나타날 뿐 종이접기 공예로서 주목 받은 예는 없다. 그 이유는 일상생활에서 행해지는 일이었기 때문에 특별하게 공예적인 차원으로 까지 발전시킬만한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봉투는 문서를 넣어 전달하는 우편의 역할과 포장의 개념이 더욱 강조되고 있어 접는 기법보다는 강도적 성질의 강화와 인쇄성에 주안점을 두고 발달하는 경향이 있다. 현재와 같은 봉투를 사용하게 된 것은 프랑스 파리에서 우편 제도가 대중화되면서, 1876년에 Madison Verde가 최초의 상업용 봉투를 만들면서 부터이다.

2.7 불교 의식용 종이접기 원류와 역사

한국 불교와 종이접기와의 인연은 봉정사의 설화이다. 즉 경북 안동의 봉정사가 건립된 672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시기는 신라 문무왕 시대로 백제, 고구려, 신라로 나뉘어 있다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이다. 당시 봉정사 창건자인 능인대사가 수행 뒤 종이접기로 봉황을 만들었는데 그 봉황이 날아가 앉은 곳이 봉정사 절터였다는 설화이다. 1972년 극락전 보수공사 때 상량문이 발견되어 한국 최고의 목조건축물 중 하나로 인정받아 국보 15호로 지정되었다.

불교의식 중에는 관욕제(灌浴祭)가 있는데 이는 흰 종이로 접은 바지와 치마저고리를 장엄구로 만들어 죄를 씻어낸 후, 불에 태워 하늘로 올려 보내는 의식이다. 이처럼 종교적인 의식용으로 종이접기가 시작 되었으나 오늘날은 팔정도(八正道)와 같은 정신 수양의 수단으로서 더욱 이용되고 있다. 또한 법륜(法輪)과 불탑(佛塔)과 같은 불교 상징물을 접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불교 교리를 이해시키고자 하는 포교 목적으로도 이용되고 있으며, 불교 설화 속에 나타나는 사물과 동물을 접어가면서 수세기에 걸쳐 내려오는 불교의 가르침을 쉽게 이해시키고자 하는 교육 목적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불교계에서의 종이접기는 대상물을 완성해 가면서 성취욕을 얻고, 일상 속에서 취미로 즐기면서 상시적 명상시간을 얻고자하는 대상으로 종이접기를 이용하고 있다.

2.8 종정도(從政圖)와 딱지 접기의 원류와 역사

종정도 놀이는 조선시대 하륜(河崙)이 이미 당나라 때 처음 만들어 즐기고 있던 것을 조선시대의 관직으로 놀이판(말판)을 바꾸어 처음 보급했다. 놀이 방법은 넓은 종이에 벼슬 이름을 품계(品階)와 종별에 따라서 써놓고 오각형의 종정노(從政櫓)를 굴려서 나온 끗수에 따라 말을 쓰는데, 최고는 영의정(領議政)을 거쳐 사궤장(賜几杖)으로 끝나고, 가장 나쁜 것은 파직(罷職)에서 사약(賜藥)으로 끝나게 되는 놀이이다. 승경도(陞卿圖)·종경도(從卿圖)라고도 한다. 종정도 놀이판은 관직을 그리고 난 다음 단순하게 접어 보관하는 형태가 아니고, 내용을 보호하는 표지까지 일정한 종이접기 기법으로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이 종정도 놀이는 계절에 관계없이 하던 놀이였지만 주로 정월에 즐겨하던 놀이가 되어 세시풍속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따라서 승경도의 승부를 통해 일 년의 운세를 점치기도 했다. 조선시대 서민들이 즐겨했던 윷놀이 판은 단순했기 때문에 특정한 종이접기 기법을 통해 보관할 필요성이 없었으나 관리들이나 양반, 그 자제들이 놀이로 즐겼던 종정도 놀이판은 특정 기법으로 접어 보관해 두고 사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관직의 명칭이 바뀌면 다시 관직명을 써서 만들었고, 크기도 컸다. 따라서 관직이 새롭게 만들어 진다거나 바뀌게 되면 다시 놀이판을 만들어 보급했다. 그 이유는 놀이이지만 과거 시험에 대한 향학열을 고취시키고자하는 의도도 있었기 때문에, 실제 상황을 현실감 있게 반영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외에 스님들이 주로 하는 놀이인 성불도가 있었고, 전국의 유명한 유적이나 마을, 경치 좋은 곳을 유람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 승람도(勝覽圖)놀이도 있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종정도를 한 기록이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는데 주변 고을의 관리들 또는 부하 장수들과도 함께 놀이를 즐겼다고 한다.36) 이처럼 종정도 놀이는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크게 유행했음을 다양한 기록에서 발견할 수 있다.33)

이외에 놀이 문화가 발달하면서 종이를 접어 만든 것이 딱지이다. 종이접기가 우리나라의 세시 풍속의 하나로서 전해져 내려왔듯 정월 무렵에 아이들이 딱지를 접어 놀이로 즐기면서 이어져 오고 있으며 오늘날은 유치원생들의 초보 종이접기 기법으로 활용되고 있다. 집단으로 딱지 접기를 한 이 후에는 이를 모아 다양한 색상을 조화시켜 그림을 만들어 내는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와는 달리 도박이나 내기를 위한 놀이 수단으로 두꺼운 종이에 기름칠을 하여 만든 투전(投錢)이 있으나 제법 상으로 보면 종이접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3. 결 론

우리의 종이 역사와 이용차원에서 종이접기에 대한 원류와 역사를 고찰해 본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우리의 종이접기 역사는 종이 제조술이 전래되었다고 하는 3세기 이전에 이미 종이가 전래되어 주술(呪術)용이나 의례(儀禮)용으로 이용되었으며, 접는다는 의미로서는 첩(疊)이라는 단어와 접지(摺紙)라는 단어가 함께 사용되었다. 그리고 삼국시대 이 후부터 직물로 만든 고깔이 풍속으로 이어져 내려왔고, 고깔을 종이로 대체하기 시작한 조선초기부터 종이접기가 대중화 되었다.

종이공예품이나 종이를 이용한 생활용품은 직물에서 유래된 것이 대부분이나 예외적으로 위목(位目)만은 신(神)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직물을 거치지 않고 곧 바로 종이를 이용한 것이 특징이었으며, 부족국가 시대 때에 주술(呪術)이나 의례(儀禮)가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전래되면서 일본에서는 신(神)을 의미하는‘가미’가 종이가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세계 최초의 접선은 고려말의 부채의 일종인 백섭선을 발전시켜 만들었으며 종이접기를 응용한 획기적인 공예품이었음을 알 수 있었고, 조선시대 초기부터 절약의 미덕으로 시작된 지화접기는 오늘날 전통한지공예 한 종류로 자리 잡아 발전하고 있었다.

종이접기도 기타의 한지공예와 같이 실용적인 차원에서 발전해 온 부분도 있었으나 오히려 세시풍속이나 놀이문화, 종교적인 차원에서 발전해 온 종이접기가 많아 한지공예의 발전 양상과는 다른 경향을 나타냈다.

Acknowledgements

본 연구는 2015년도 전주대학교 학술연구비에 의해 수행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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